땅끝에서 기다리는 봄의 바다

  • 등록 2013.03.08 10: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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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종료되면 'The End'라는 자막이 나오고 관객들은 자리를 떠야 한다. 끝은 종료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발걸음이 무겁기도 하다. 해남 땅끝마을을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땅도 끝이 있는가? 그 끝은 우리가 관념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 끝과 다른 것 아닌가? 일정하게 구획된 지역에 맨 끝자락이 다름 아닌 끝 아니겠는가. 한국에서 육지 끝이라는 것일 뿐 저 멀리 제주 마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 아닌가. 그 어디든 끝은 있다.

달마산 미황사를 들러 해남 송지해수욕장의 수려한 해변을 지나는데 마침 햇살이 해넘이 준비와 함께 수평선과 맞닿은 바다색은 그야말로 아름답다붉은 햇살을 열어주듯 파란 하늘빛이 띠 모양으로 퍼진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땅끝 가는 길은 고요하고 잔잔한 남도바다의 품 그대로다. 그러다 갑자기 길이 험해지면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니 그곳이 땅끝이란다. 30여년 만의 발길이다. 강산이 서너 번 변했을 시간이고 한 세대가 통과한 시간이다. 신입 기자로 봄소식을 알리려 이곳 해남 땅끝을 찾았던 때다. 그때도 역시 마늘밭에서 올라온 풋풋함을 배경으로 멘트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바다가 아닌 밭에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파랗게 올라오고 있는 마늘밭이 보인다. 기억의 자취는 멈춰있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땅끝마을은 상전벽해가 되어 있으니 놀랍기만 하다.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이 변해버린 광경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에 남아있던 추억이 순간 사라져버린다

끝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했던가. 끝을 봐야 다시 부활이 움튼다고 했던가. 처세의 지혜로 그런 말들로 종종 위안을 받으면서 우리 삶의 회복을 꾀하는 게 세상살이지만, 땅끝에 오니 그 끝이라는 관념보다는 바로 눈앞에 펼쳐진 섬이 다시 반기는 풍경 속에 진화만 계속된다. 행정구역상 전남 해남군 이서면 갈두리 땅끝은 그런 점에서 외로운 지명은 아니다. 그래도 끝은 끝이다.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사이로 저 건너에 보길도가 있다. 돌아가자니 온 길이 너무 멀고 건너자니 돌아올 시간이 어중간하여 멈춰있다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바다를 보니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고산 윤선도의 심사가 그랬을까? 해남에서 저 바다 건너 보길도로 유배의 몸이 되어 이 바다를 건넜을 법한 그 유형의 세월에 바다는 어떻게 출렁거렸을까. 그는 시대의 고통을 언어의 연금술로 빚은 당대의 음유시인으로 자신을 승화시키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강진의 정약용도 그렇고, 요즘 낙양의 지가를 한껏 올리는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도 유배지에서 걸작을 탄생시킨 것 아닌가. 끝이라는 아득한 공간의 처소가 주는 고독감이 언어를 빛나게 하는가. 어부사시사의 바다가 출렁인다.

그 보길도 섬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해남 땅끝마을이다. 사람이 몰리다 보니 새로 뱃길이 생긴 셈이다. 사람이 길을 만든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땅끝에서 보길도 간 카페리는 한 시간 간격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왕복한다. 봄이어도 아직 겨울의 찬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하는 포구지만 페리를 타려고 기다리는 자동차 행렬이 제법 된다. 페리로 진입하는 선착장 입구가 좀 협소해 보인다. 30분이면 닿는다는 보길도 바닷길. 땅끝에서 보면 아득한 바다만 출렁이는 줄 알았는데 섬들이 친구처럼 얼굴 내미는 정겨움이 좋다. 고산 윤선도도 그런 마음으로 적막을 달래며 시문을 지었을까. 항로라기보다 마치 이웃집 마실 가는 길 같은 땅끝-보길도 뱃길에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봄을 부르는듯하다.

봄은 역설적으로 끝에서부터 오지 않던가. 지금 우리의 팍팍한 삶이 저마다 끝이라는 절망에 있지만, 땅끝에 제일 먼저 봄이 상륙하듯이 봄을 고대해보자. 마음으로라도 봄을 승선시켜보자.

 

땅끝에서 신창섭

 

 

신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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