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눈물의 반값’ 세일…조선업 긴 한숨
국내 조선소 12척 ‘리세일’ 나설듯. 주인 못찾는 선박…애물단지 전락
우리나라의 배 만드는 기술은 세계 최정상급이다. 외국 선사들이 한국 업체에 배를 주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밀려드는 선박주문은 우리 경제를 후끈 달궜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글로벌 경기침체는 한국 조선업계에 강펀치를 날렸다. 선주들이 주문한 선박을 찾아가지않고 있어서다. <편집자주>

건조 중인 선박을 발주자가 아니라 조선소가 내다파는 일(리세일, Re-Sale)이 벌어지고 있다. ‘수주 가뭄’으로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업체들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최근 국내 조선소에 12척의 선박을 발주한 대만 선사 TMT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건조자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국내 조선업계‘눈물의 리세일’이 흔한 일이 됐다.
실제로 신아sb는 지난 2008년 탱커(5만t급)를 발주한 아랍에미리트(UAE)의 한 선주사가 계약을 취소했다 다시 사가기도 했다. 발주 당시의 가격은 6200만 달러였지만, 리세일할 때 가격은 그 절반(약 3200만 달러) 수준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선주사가 인도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완성된 배는 녹슬게 되고, 이를 위한 보수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 가뜩이나 신규 수주가 끊긴 조선소만 골병들게 되는 구조”라고 한탄했다.
주인 잃은 12척의 향방은 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삼호중공업 등에 12척의 선박을 발주한 대만 선사 TMT가 이들 선박의 건조자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황 악화로 인한 자금난이 직접적 원인이다.
선주와 조선소들이 계약을 할 때 선주가 건조자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건조선박에 대한 권리는 해당 조선소들이 넘겨받도록 돼 있다. 때문에 TMT가 발주한 12척의 선박은 국내 대형 조선소들이 넘겨받을 가능성이 높다.
업체별로는 현대삼호중공업이 캄사르막스급(8만~9만t) 벌크선 7척과 초대형광탄운반선(VLOC) 2척을 포함, 총 9척으로 가장많다. 이어 현대중공업 VLOC 2척, 대우조선해양 드릴십(심해시추선) 1척 등이다.
TMT가 자금을 마련해 해당 선박을 인수하면 다행이지만 TMT가 자금난을 겪고 있어 가능성이 낮은 형편이다.
현대삼호중공업은 이미 벌크선 7척을 매물로 내놓았다. 현대삼호중공업이 받은 선수금은 30% 정도다. 따라서이들 선박을 시장에 내다 팔면 큰 손해는 없을 것으로 회사 측은 전망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관계자는 “유럽의 신용 불안이 한국·대만 등의 아시아국가에서 자금을 빠져나가게 함으로써 이들 국가의 금융기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이로 인해 해운사들의 자금줄이 마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1년 넘게 떠있는 배도 있다.
TMT가 국내 조선소에 발주한 물량 중엔 이미 건조한 선박이 최대 1년 넘게 조선소 앞바다에 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현대미포조선은 지난해 8월 건조 완료한 3만7000DWT(재화중량톤수·선박이적재 가능한 화물 중량)급 벌크선 1척을 매각하기 위해 시장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도 같은 해 건조한 초대형유조선(VLCC) 1척에 대한 매각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선주가 장기간 선박을 인수하지 않을 경우 조선소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이미30%의 선수금을 받아놓은 상태여서 선박을 바로 매각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나 재매각이 여의치 않아 장기화될 경우 보관 및 관리 비용이 선수금 이상으로 발생해 그 손해를 조선소가 떠안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업계 관계자는 “시황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어 선박 가격이 발주 시점보다 많이 떨어진 상태”라며 “선뜻 나서는 매수자도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헐값 부른 ‘헤비테일’ 지급 방식
인도 때 대금 몰아받기 계약,
불황 장기화로 취소 늘어날 듯
선박의 건조자금 지불은 선박 인도시점에 대부분의 배값을 지급받는 헤비테일 방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우리나라 조선소들은 '헤비테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선박 인도 때 대금을 몰아 받는 계약 구조이기 때문에 불황이 장기화될 경우, 국내조선소의 피해는 더 커질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삼호중공업은 지난 2010년 TMT로부터 헤비테일 방식으로 2억6200만 달러에 수주한 벌크선 7척의 리세일을 지난 주 완료했다.
선박 자체는 6월경 완공됐으나, TMT가 장기간 선박을 인도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TMT는 계약 당시 선수금 30%를지급한 이후 나머지 대금은 지불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안 그래도 시황 불황으로 선가가 떨어진 상황에, 미인도 현상까지 장기화되면 도크나 안벽에 세워둔 선박 유지비만 해도 어마어마해진다.
이에 따라 피해를 최대한 줄이자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실은 그리 크지 않다는 분석이
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현대삼호중공업이 나머지 선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1척당 2600만 달러가량에 매각돼야 한다.
지난주 리세일 과정에서는 1척당 2400만~2450만 달러 수준으로 거래되면서 현대삼호중공업의 피해 규모는 총 1640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이외에도 TMT로부터 초대형광탄운반(VLOC) 2척을 수주해 건조를 마무리 했으나, 인도가 늦어지고 있는 상태다.
현대삼호중공업의 모기업인 현대중공업도 똑같이 VLOC 2척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리세일은 곧 선주와의 계약 해지를 뜻한다. 벌크선 7척을 처분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업계에서 선주와의 관계형성은 최우선 사안이기 때문에 리세일은 극단적 선택에 속한다.
자연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의 남은 미인도 선박들에 대한 리세일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현재 TMT 측과 인도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도 지난 2007년 TMT로부터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2척을 수주해 건조를 완료했으나, 대금결제가 늦어지면서 인도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현대중공업 등과 마찬가지로 TMT와 선박 인도 여부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다만 당사자 및 업계에서는 현대삼호중공업 사례와는 달리 리세일 같은 상황은 오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10%의 선수금만 받고 나머지 대금은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쪽으로 협상이 마무리 될 것”이라며 “만에 하나 계약이 파기된다 해도 피해는 미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은 VLCC 계약 당시 선주 책임으로 인도시기가 늦춰질 시를 대비해 떨어진 선가는 선주가 부담토록 하는 등의 조항을 합의한 것으로 안다”면서 “계약 파기는 양쪽이 모두 좋지 않은 일인 만큼 늦더라도 TMT가 선박을 인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분석했다.
*헤비테일(Heavy Tail) 방식=특정 조선사에 선박을 발주한 선주가 건조대금을 지불하는 방식 중 하나. 계약 시 소량의 착수금을 우선 지급한 뒤 대부분의 건조대금은 인도 시 몰아주는 형식으로 불황에 많이 나타나는 거래 형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