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크루즈산업

2014.06.23 16:11:44

크루즈 CCK 오필립 前회장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거칠고 매마를 땅’이라는 의미의 ‘불모지’(不毛地)라는 말은 한국 크루즈 업계인들에게 아직 친숙한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 크루즈계의 선구자 오필립씨는 이제 그곳에서 아름답게 돋아나는 새싹들을 관망한다. 1989년 한국에 처음 크루즈를 도입하여 언 25년간 돌 박힌 황무지를 개척해온 그는 명실공히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 2013년 은퇴 이후 줄곧 거절했던 인터뷰지만 몇 번의 설득 끝에 어렵사리 쉬퍼스저널이 함께 했다.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첫인사와 함께 그가 스크랩해 건낸 지난 기사들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크루즈 외길 사랑, 그것과 다름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노고에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며 지금부터 시작될 그의 이야기는 한국 크루즈계의 시작과 그 역사에 대한 회상이다.



먼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가 성사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 은퇴한 상태고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아서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뭐든 물어보세요(웃음).


Q. 업계 모든 분들이 오필립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한국의 크루즈 산업은 없었다 하십니다.
 1989년에 시작했으니 생각해보면 참 오래전 일이죠.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겁니다. 당시만 해도 크루즈가 한강 유람선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여행업계 사람들도 아예 크루즈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였어요. 제가 직접 하루 8시간 동안 강의도 하고 광고도 참 많이 하고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인식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어요. 많이 투자하고 노력도 많이했죠. 지금까지 크루즈에 쏟아부은 돈만 20억 정도 되니까.



Q. 굉장하십니다. 크루즈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미국에 살던 곳이 LA 주변 팔로스 버디스라는 해안 도시였는데 밤에 저의 집 정원에서 바라봤던 크루즈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제가 사실 고향이 이북이라 ‘저걸 타고 반대 방향으로 계속 가면 고향일 텐데’하는 막연한 그리움도 있었고. 당시 미국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사업을 하면서 돈걱정은 안하고 살던 때였어요. 크루즈쪽 일을 한번 시작해봐야겠다 해서 크루즈 홀리데이즈 본사의 인터내셔널 마케팅 디렉터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 처음 크루즈 사업을 시작하실 때, 말하자면 ‘한국 크루즈 산업의 태동기’랄까요. 그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89년 장모가 돌아가시면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크루즈사업을 한국에서 시작해 보면 좋을 것 같았어요. 크루즈 홀리데이즈의 한국지사 따내서 지사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아시아에 크루즈라는 게 아예 안다닐 때죠. 선사들이 아시아 시장에 관심도 없었지. 지금은 다들 아는 카니발, 로얄 캐리비안, 홀란드 아메리카 라인, 프린세스, 코스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루즈 선사 GSA만 10개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으니까요.

 지면 광고나 홍보도 많이 했고, 내 돈으로 여행사 사람들 데리고 마이애미, 알래스카, 지중해 크루즈 팸투어도 많이 시켰어요. 김세환씨가 진행하던 교통방송 라디오에 매주 한 번씩 방송 출연도 했고. 말하자면 긴데, 크루즈를 소개하는 자리라면 무조건 발로 뛰었죠.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크루즈쪽에서 좀 일했다는 사람들은 다 제 밑에서 컸다고 보면 되요. 시스템이 전혀 없던 때였으니까 교육도 많이 시켰지.

Q. 정말 말 못할 사연도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던 이유도 그거에요. 크루즈의 선구자라고는 하지만 나는 정작 너무 힘들었거든. 지금 만나봐서 알겠지만 제가 IMF때 스트레스로 입 쪽에 마비가 왔어요. 미국에서 나름 많은 돈을 벌었는데 한국에서 투자는 많이 하고 번 건 없어요.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크루즈 쪽이 패키지로 묶어서 몇 십명, 몇 백명 묶으면 돈이 제법 커지니까 그렇게 사기꾼들이 모이더라고. 크루즈 선사를 한번 해보자 해서 2007년에 롯데 관광개발에서 상임고문으로 100억 정도의 펀딩을 약속을 받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었는데, 그것도 당시 용산 개발 사업으로 투자금이 쏠리면서 백지화가 되었지.

 은퇴를 하고 가끔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크루즈 일을 했던 게 좀 후회가 들 때도 있어요. 선구자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 누군가에게 자꾸 하는 것도 뭔가 떳떳한 것 같지 않고. 그렇지만 적어도 미련은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봤고 내 역할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면 후배들에게 내가 길을 열어준 거니까. 내 재능과 돈을 기부했다 생각해요.

Q. 한국 크루즈 산업이 앞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사람이든 회사든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서로를 너무 지나치게 견제하거나 속이려고 들면 업계가 같이 죽는 거야. 지금까지 전 여기까지 오면서 사람한테 제일 많이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업계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뭉쳐서 함께 노력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봐요.

Q. 은퇴를 하셨지만, 완전히 크루즈 업계를 떠나신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고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일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실 은퇴 전부터 ‘성지순례 크루즈’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선상에서 예배도 보고 성경공부도 하면서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중해 5개국을 14박 15일로 일주하는 패키지입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올해 200분 정도를 인솔해서 가을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Q. 아직도 지치지 않은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크루즈 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사나 취미라면 어떤 것이 있으실까요.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요. 주로 클래식 음악이나 종교 음악을 듣는데, 한 때는 한국에서 제일 좋은 스피커를 가지고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 인생에서 신앙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에요.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주중에 중보기도 자리에도 꾸준히 참석합니다. 제 나이가 이제 얼마 있으면 80인데 제 몸도 후에 신학교인 경희대학교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숙연해집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 한국 크루즈 산업도 확실히 많이 성장했고 후배들이 제가 간 길 위에서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진정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건강하시고 또 찾아뵙겠습니다.

취재, 글. 신승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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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대한신학교 졸업. 몬타나 주립대 경영학 학사. 미국 시민권 획득 후 시어스 백화점의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미국 10대 판매왕에 5년 연속 선정. 투데이즈 트레이딩 & 인베스트먼트 대표. 어쎔 아라비안 프로젝트의 총괄 매니저. 크루즈 홀리데이즈 인터내셔널의 국제 마케팅 총책임자. 1989년 동일 회사의 한국지사 설립, 10대 크루즈 선사의 GSA 획득. 2006년 제 33회 한국관광공사 사장 표창장 수상. 롯데 관광개발(주) 상임고문. 크루즈 CCK 회장 취임. 2013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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