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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

'해운왕'이라 불린 사나이 오나시스



1968년 10월 17일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 해에 자리한 작은 섬 스코르피오스. 이날 스코르피오스 섬에선 지구촌의 관심을 모은 잔치가 열렸다. ‘해운왕’(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재클린 케네디가 결혼한 것이다. 당시 오나시스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갑부였고, 재클린(결혼 후 이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은 1963년 11월 22일 암살당한 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미망인이었다. 둘의 결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퍼스트레이디 시절 남다른 패션 감각을 뽐내며 ‘미국의 연인’으로 불리던 재클린의 마음을 사로잡은 오나시스란 그리스인에게 많은 눈길이 쏠렸다.

신화를 쓴 그리스인
 오스만 제국의 항구도시 스미르나(현 터키 이즈미르)에서 그리스계 담배 상인의 둘째로 1906년 1월 20일(15일이란 기록도 있음) 태어난 오나시스의 본명은 아리스토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이름을 이어받은 오나시스의 삶은 그리스인들한테 신화로 통한다. 세계 해운업계에서도 그는 전설적 인물 대접을 받는다. 오나시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2006년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에서 열렸을 때, 그리스 총리가 “그는 진정한 신화”라고 칭송했을 정도다. 오나시스의 아들 이름으로 설립된 ‘알렉산더 재단’이 마련한 전시회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그 신화를 넘어’ 개막 연설에서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는 “오나시스의 인생과 그의 성공 이야기는 전세계 그리스인들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미르나에서 오나시스 집안은 넉넉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터키 공화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잃고 만다. 난민 신세가 된 오나시스 가족은 1922년 고국인 그리스로 되돌아왔다. 오나시스는 이때 해운업과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6살 소년이 생계를 이으려 일자리를 찾다가 중고 선박에서 일하게 됐다는 것이다. 앞서 고향인 스미르나 항구에서도 담배 수출을 위해 해운회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바다를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본격적으로 해운업을 시작한 것은 10년이 지난 뒤였다.

 오나시스는 1923년 17살 나이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다. 당시만 해도 ‘부자나라’였던 아르헨티나는 어린 이민자한테 ‘기회의 땅’이었다. 250달러만 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푸에르토 마데로 항구에 홀로 도착한 오나시스는 음식점, 세탁소, 목공소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영국 전화회사에 취직했다. 야간 교환수로 일하며 스페인어를 공부하던 그는 첫 사업을 시작한다. 담배 수입이었다. 담배 사업 2년 만에 오나시스는 10만 달러를 벌었다. 담배 공장도 설립했다. 25살이 되자 재산은 100만 달러로 늘었다. 그의 사업 수완은 그리스 정부가 인정할 정도였다. 그리스 정부는 오나시스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그리스 총영사에 임명하고, 아르헨티나와 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맡겼다.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진 1930년대 오나시스는 ‘해운왕’ 등극을 위한 첫발을 뗐다.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담배 사업을 접고, 해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1930년대 초 중고 화물선을 구입하면서 해운업을 시작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선박 수를 늘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50년대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석유수송 독점계약을 맺기도 했다. 해운업을 통해 세계적 갑부가 된 오나시스는 조선, 광산, 부동산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리스 국영 항공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오나시스는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1946년 결혼한 첫 아내와 1960년 이혼한 그는 1968년 재클린과 재혼하기에 앞서 전설적 오페라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와 염문을 뿌렸다.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세계적 유명인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해운왕’에 오른 비결
 오나시스가 그리스로 돌아와 해운업에 뛰어든 1932년은 세계 해운 물동량이 급감하며 해운업계가 위기에 빠졌을 때였다. 게다가 오나시스가 처음 구입한 7000톤급 화물선은 폭풍우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하지만 그는 선박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물동량이 줄면서 경영난에 빠진 캐나다 국영 증기선사(Canadian National Steamship Company)로부터 대형 화물선 6척을 총 12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해운업이 극심한 불황에 빠진 상황이어서 1척당 가격이 200만 달러에 달했던 선박들을 고철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셈이다.

 오나시스는 인수한 화물선 6척 가운데 2척에 아버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와 어머니 ‘페넬로페 오나시스’의 이름을 붙이고 해운업을 시작했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은 오나시스에 대해 “1931년 해운업에 처음 손을 대 중고 선박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1973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아들 알렉산더를 기리기 위해 만든 오나시스 재단은 홈페이지(www.onassis.gr)를 통해 1932년 첫 선박을 구입했다고 설명한다. 또 오나시스가 해운업으로 성공한 데 대해 위키백과 한국어판은 “1938년 대형 유조선을 소유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미국 정부의 비호와 전쟁 특수로 재산을 더욱 불렸다”고 설명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연합군을 위해 식량과 원유 등 군수물자를 수송하다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오나시스 소유 선박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다는 것이다.

 오나시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 쪽 선박에 대한 소득세 면제와 전략보험 등을 활용해 수익을 거두었으나 결국 손해를 입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선박 수를 크게 늘린 덕분에 ‘해운왕’에 올랐다는 게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특히 1954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원유수송 우선권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는 안정적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는 유조선 선단을 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대형 유조선 선단을 거느린 오나시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원유수송 시장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한 오나시스가 1938년 첫 대형 유조선(1만5000DWT급 아리스톤 호)을 건조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쟁용으로 건조된 미국의 유조선을 헐값에 사들이는 등 일찍부터 유조선 선단을 꾸리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덕분이기도 하다.
 또 오나시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정부로부터 불하 선박을 대량 구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큰 이득을 거둘 수 있었다. 애초 오나시스는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불하 선박 구입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만 불하 선박 구입이 가능하다’는 게 미국 정부가 내건 조건인데, 오나시스는 그리스와 아르헨티나 국적뿐이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아들 알렉산더 이름으로 뉴욕에 해운회사를 세우고 미국인 경영자를 내세워 이를 해결한다. 미국의 불하 선박과 은행 융자를 받아 건조한 유조선으로 선단을 꾸린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럽 재건과 석유산업 발전, 6·25전쟁 특수 등을 활용해 ‘해운왕’에 올랐다.

화려하고 불행한 삶
 작은 키(165㎝)에 외모도 별 볼일 없었던 오나시스는 남다른 사업 수완을 밑천 삼아 갑부가 됐다. 어린 시절 고생을 했다지만 젊을 때부터 큰돈을 벌면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화려한 삶을 살았다. 먼저 ‘바람둥이’인 그는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결혼도 2번 했다. 하지만 마지막은 외로웠다. 오나시스는 1946년 당시 그리스의 ‘선박왕’으로 불리던 스타브로스 리바노스의 딸 아시나 리바노스와 결혼했으나 1960년 이혼하고 말았다. 유부녀였던 마리아 칼라스와의 외도 때문이었다. ‘세기의 소프라노’로 불리던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태어나 오나시스와 17살 차이가 났는데, 오나시스는 1957년 칼라스와 처음 만난 뒤 선물 공세와 호화 요트 여행 등을 통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칼라스는 남편과 이혼하고 오나시스와 재혼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세계적 화제가 됐던 1968년 재클린 케네디와의 재혼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자신과 아이들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재클린에게 오나시스는 구세주와 같았다. 엄청난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주겠다는 오나시스와의 재혼을 결심한 이유다. 오나시스는 스코르피오스 섬을 선물하는 등 23살이나 어린 재클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큰돈을 썼다. 그러나 둘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7월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선 오나시스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권력을 위해 미국 대통령 미망인 재클린에게 구애를 했고,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돈을 보고 결혼한 탓에 5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둘의 관계는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재클린에겐 유산을 상속할 수 없도록 하라는 유서를 남겼고, 이에 반발한 재클린이 긴 법정싸움 끝에 20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 받았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오나시스는 자식을 일찍 잃는 아픔도 맛봤다. 그에겐 아들 알렉산더와 딸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알렉산더 이름으로 해운회사를 설립하고, 주말마다 호화로운 선상파티를 개최하던 요트에 딸 이름을 붙일 만큼 오나시스는 자식을 아꼈다. 그런데 아들 알렉산더가 1973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25살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오나시스는 1957년 그리스 국영 항공사를 인수해 설립한 올림픽 항공 지분을 모두 정부에 넘겼고, 2년 뒤인 1975년 3월 15일 프랑스 파리 부근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71살 되던 해였다.
오빠와 아버지가 잇따라 사망한 뒤 ‘해운왕국’을 이어받은 크리스티나도 행복하지 못했다. 오나시스 재산의 절반을 물려받은 크리스티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몇 번씩 자살을 시도하다가 1988년 3살배기 딸 아티나를 남겨두고 37살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현재 살아있는 오나시스의 혈육은 외손녀 아티나가 유일하다. 아티나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화려한 결혼식이 열렸던 스코르피오스 섬을 포함해 25억 유로나 되는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스코르피오스 섬은 올해 러시아 갑부 드미트리 리볼로브레프의 첫째 딸인 예카테리나 리볼로브레프가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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