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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하는 청춘들에게…


 본격적으로 새출발의 시기가 됐다. 대학에는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파릇파릇한 기운이 넘쳐날 것이고 사회에 나온 청춘들은 저마다 간직한 꿈을 향해 첫걸음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청년실업, 카드빚에 시달리는 선배들을 보면 마음이 마냥 상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청춘들 사이에서 ‘잉여’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고 있는 것도 우울한 현실이다.

 난 박정희 키드라 솔직히 잉여의 아픔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잉여란 말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옛날 <잉여인간>이란 영화가 있었다. 1964년 개봉된 영화로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유현목 감독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제작비 500만원 정도에 5만명의 관객을 끈 대흥행작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다루는 잉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자처하는 잉여와는 매우 다르다.

 극중 주인공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아도는 인간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아주 적극적인 마인드로 인생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이다. 막말로 취업도 안되고 현실은 개판이어도 세상에 희망이 없겠냐, 하는 낙관적인 드라마다. 지금의 자칭 잉여들이 보면 동의하지 못할 계몽적인 드라마인데 유현목 감독님과 친분이 있었던 김수용 감독님은 그런 점에서 <잉여인간>이 1961년작 <오발탄>에 비해 이념적으로 후퇴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어쨌거나 나의 부모 세대들은 그런 대책없는 낙관주의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러니까 잉여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1960년대 초 잉여라고 느끼던 사람들, 그러니까 돈도 없고 비전도 없다고 하던 당대의 젊은 사람들은 지금 70, 80대 쯤이 됐을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다. 그 아들 세대인 386세대들은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스스로 잉여라고 칭하지는 않았으니 축복받은 세대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물질적 잉여가 넘쳐나는 지금 인간들에게 잉여라는 말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잉여인간>이 나온 1960년대를 기점 삼으면 대략 반세기 이상이 지난 세월이다. 내가 건방지게 지금 잉여라고 자처하는 청춘들에게 한 마디 훈수를 할 입장도 아니고 자격도 없다. 나와 내 비슷한 세대는 이날 입때껏 스스로를 ‘잉여’라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가짐이 일견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세상에 태어났다면 잉여란 없다. 물건도 아니고 사람에게 잉여란 말 자체가 얼마나 서글픈가. 저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저 이외의 나머지를 잉여라고 생각하고 자근자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제국주의, 남자의 논리이다. 잉여라는 자조는 그런 논리에 순응하는 꼴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논리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미 기득권이 되어버린 386의 이런 말이 무책임하고 허망할 수도 있겠다마는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잉여는 아니라는 게 내 고집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자신있게 얘기하진 못하지만 세상에서 사람이 먼저다 라는 사실을 믿고 싶다. 청춘의 시기를 통과해 온 사람들은 안다. 찬연한 환희 뒤엔 모진 고통과 얼룩진 슬픔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이 봄 손 한 번 내밀어주고 싶다. 그대들은 잉여가 아니라 어딘가에 맞춤하게 태어난 소중한 인간이라고.

글. 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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