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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

 국민학교 때 우리집에는 삼중당문고가 꽤 많이 있었다. 부모가 독서광이어서가 아니라 인쇄소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파본이나 남은 책들을 가져다 놓은 것인데 글자도 작고 제목도 국민학생에겐 어려워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년잡지나 만화책 등 읽을만한 게 떨어지면 삼중당문고를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 중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만한 만만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으니 바로 <병신과 머저리>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나 <생의 한가운데>는 못 읽어도 이건 읽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병신과 머저리라니. 길창덕 만화같고 얼마나 쉬워보이는가. 그런데 채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뭔말인지 몰라 포기하고 말았다. 병신과 머저리 얘기가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그렇게 병신과 머저리는 어려운 무엇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 <병신과 머저리>를 최근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떼우다 선 채로 읽었다. 전쟁터에서 동료를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인데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 더 찡하게 와 닿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간지라도 나는데 <병신과 머저리>는 슬프고 초라하고 정말 병신과 머저리처럼 짠한 울림이 온다. 와닿음도 감동적인 와닿음이 아니다. 아프다기보다는 창피해서 서둘러 봉합해버린 상처를 사정없이 파헤치는 노골적인 자연주의적 와닿음이라고나 할까.

 전쟁터에서 비굴하게 살아남은 주제에 자기 역사를 왜곡시킬 뻔뻔함도 없는 소시민인 머저리는 전쟁이라는 상흔도 없으면서 지레 주저하고 기꺼이 비겁함을 택하는 동생에게 병신새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비단 동생뿐만 아니라 패배감과 자조에 빠져 의지를 상실한 60년대 당시 한국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청준 선생은 이 작품을 서른이 안 된 27세에 발표했다. 소설의 문학성도 훌륭하지만 사회를 보는 통찰력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말하는 비판적 성찰은 오늘날 상황에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60년대가 전후의 상실감과 패배감에 무력감을 겪었다면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경쟁논리와 경제적 압박에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아픔을 겪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전쟁이나 호환마마보다 무섭다고는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진짜 전쟁의 아픔에 비할까.

 우리가 겪는 아픔이 어떤 아픔이건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을 때 혹은 모를 때 그 아픔은 엄살이다. 우리도 혹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환부도 모르면서 지레 겁먹고 주저하는 건 아닌가. 병신과 머저리처럼.

글 / 사진. 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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