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9 (월)

  • 흐림동두천 10.5℃
  • 구름많음강릉 11.7℃
  • 서울 10.8℃
  • 흐림대전 12.7℃
  • 흐림대구 17.6℃
  • 구름많음울산 20.9℃
  • 광주 12.7℃
  • 맑음부산 19.2℃
  • 흐림고창 10.0℃
  • 박무제주 16.1℃
  • 흐림강화 8.4℃
  • 흐림보은 13.7℃
  • 흐림금산 14.0℃
  • 흐림강진군 13.4℃
  • 구름많음경주시 19.7℃
  • 구름조금거제 17.9℃
기상청 제공

CSR

사랑과 시간이 필요한 때

 “제국주의를 대외정책으로 민주주의를 대내정책으로 쓸 수 있었던 저 자유자재한, 행복한 시대는 영원히 가고 우리는 지금 국제협조, 후진국 개발의 새 나팔이 야단스러운 새 유행 시대에 살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거름으로 써야 할 식민지를 부앙천지 어느 곳에서 손에 넣을 수 있으랴. 그러나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주인공에게 그가 존경하는 여자친구는 식민지의 대용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막 뺏고, 퍼내도 아깝지 않을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그가 반문하자 여자친구는 있다고 말한다.

 바로 ‘사랑과 시간’이라고.

 남자는 경악하여 넉넉히 십 분 남짓을 망연자실한 끝에 모기 소리만하게 대꾸한다.

 “여자여, 그대의 언(言)이 미(美)하도다”

 그리고 그녀를 미친개처럼 키스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다른 여자가 그에게 미국에 갈 생각이 없냐고 묻자 그는 흥미없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 전체가 유학하고 있는 셈 아니냐고. 보는 것, 듣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미국문화 아니냐고. 앉아서 경험하는데 뭣 하러 돈 쓰고 가냐고.

 여자는 그에게 내셔널리스트라고 말한다.

 그는 그게 문제라고, 난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고, 국문학이라는 과가 내셔널리스트 되기에는 나쁘지 않은 분야인데 그렇게 안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왜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자신이 없어서 그렇죠”

 주인공은 장광설을 펼치며 이야기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한국문화가 서양문화를 몰아세울 앞날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춘향이는 절대 줄리엣이 될 수 없고 어차피 파마를 할 것이고 자동차를 타고 끝내는 재즈에 춤추고 급기야 이몽룡과의 사랑에도 권태에서 오는 저 무서운 사랑의 파국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이 흐름이다.

 이런 식의 지식인의 비겁하고 비관적인 태도 때문인지 ‘민족문학’을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회색인>은 비판받기도 했다. 물론 주인공의 자조대로 비겁하고 나약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혁명과 역사보다는 장미꽃과 사랑, 등산이 중요한 현실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생각해 보는데 훨씬 적확한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감상만으로 <회색인>의 방대한 내용을 다 전할 수 없을 뿐더러 나도 모르는 곡해가 있을 수도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찬찬히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이런 뜻밖에 낙관적인 부제들도 참 좋다. “생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 맘 먹는다는 게 좀 대단한 일이지만”

글. 김지태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