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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앞바다 랜드마크가 된 하멜 전상서


 미항으로 유명한 여수에 가면 하멜등대가 있다. 빨간색 예쁜 등대는 해양도시 여수의 낭만적 랜드마크처럼 되어있는데 그 주인공인 하멜의 인생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했다. 낭만은 커녕 조선땅에서 그의 인생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멜은 야심찬 모험가나 선원이 아니라 그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서기였다. 자잘한 돈 관리를 했던 것 같은데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최초로 제주도에 표류했을 당시 제주목사는 꽤나 너그러웠는데 새로 부임한 목사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고생 깨나 했다고 한다. 하멜 일행의 본격적인 고생은 한양으로 압송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선은 표류한 외국인을 제 나라로 보내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었다. 조선이 다른 나라 특히 서양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렸기 때문이다. 하멜의 선배 벨테브레 역시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이었는데 박연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조선에 귀화해 조선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하멜은 박연과 몇 번 대면을 했지만 조선에 귀화하기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조선에선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조선 왕이었던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펴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하멜의 청을 거부하고 그 일행을 군대에 집어넣어 버렸다.

 네덜란드가 총포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고 군사로 이용하려는 정략이었다. 당시 조선 군대에는 청나라 군사도 있었는데 하멜 일행은 하필 청나라 군사들과 숙소를 같이 배정받았다.

 군인이 아닌 하멜 일행은 군대에 들어가 극심한 고생을 했다. 하멜 일행은 청나라 사신에게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했지만 조선군대에 걸려 죽도록 매만 맞았다.

 조선 군대는 골치덩어리인 하멜 일행을 여수, 순천, 남원 등 전라도 병영으로 뺑뺑이 돌리며 분산수용시켰다. 그 중 하멜 일행 몇명이 동냥으로 모은 돈으로 몰래 배를 사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조선에 억류된지 13년 만이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며 13년간 온갖 고생을 하던 하멜 일행은 가까스로 나가사키를 거쳐 고향 네덜란드로 갈 수 있었다. 하멜이 조선표류기를 쓴 것은 그에게 작가적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가사키 봉행에서부터 고향 네덜란드에서 받았던 심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세히 얘기하라고 하니 안 쓸 수가 없고 기억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멜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 13년간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세월을 용케도 일목요연하게 기억해 내 정리했다. 그 덕분에 서양 세계에 조선이란 나라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원하지도 않았던 조선 땅에 와서 죽도록 고생만 한 하멜. 한국의 아름다운 바다가 그대를 기리고 있으니 부디 영면하시고, 앞으로도 여수를 아름다운 미항으로 지켜주시길 바라옵니다.

글. 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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