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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생각하며


 백석 시인의 시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다. 시에서 풍기는 샤갈의 그림같은 선연한 회화성과 “세상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라는 비장미의 언발란스가 매우 독특해서 단박에 뇌리에 꽂힌 기억이 있다. 그리고 흰당나귀라니. 동화적이면서 조형적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최근에 안 사실인데 백석의 시들 중에 나귀와 당나귀가 종종 등장하곤 한다. 당나귀가 자유와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것 같은데 그것 뿐만아니라 순수하게 조형적인 회화성을 시에 부여하고자 당나귀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시인 백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백석이 첫눈에 꽃혀서 사랑한, 그리고 백석의 사랑 못지 않게 백석을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내게는 더 흥미롭다. 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사랑 백석>이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김자야 여사의 이야기인데 백석의 문학성을 논하는 글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아마 시인 백석으로라기보다는 인간 백석을 사랑했기 때문 아니었나 싶다.

 1936년, 고교 선생님이었던 26세의 백석과 조선권번 출신 기생이던 22세 김진향은 함흥의 한 술집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두 사람 다 첫 눈에 반해 그 날로 사랑을 불태웠다. 백석은 김진향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스스로 마누라라고 부르며 끔찍히 사랑했다. 그 후로는 완고한 집안 출신의 인텔리 남자와 자유분방한 여자가 그 시대에 겪던 비극이 되풀이됐다. 자야는 자유분방 정도가 아니라 조선권번의 알아주는 기생이었으니 두 사람의 공식적인 결혼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자야와 백석은 함흥을 떠나 서울에서 재회한다. 청진동에 비둘기집같은 살림집을 차리고 여염부부처럼 알콩달콩하게 신혼살이를 하던 짧은 시간이 이들에겐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다. 백석은 자야를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들과 세 번 결혼했다. 집안의 강경함에 거역하지 못하는 효자였던 백석은 세 번 강제로 결혼을 하면서도 자야를 잊지 못했다. 그렇게 잊지 못하고 떨어질 수 없는 여자가 있다면 왜 더 결사적으로 결혼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답답할 정도다. 백석에게 첫날밤부터 소박을 당한 그 세 여자들은 뭐란 말인가. 자야 역사 못지않게 시름으로 나날을 보냈을지 모르는 그 여인네들도 한 많은 인생이었으리라.

 세상 이꼴 저꼴 다 보기 싫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어딘가 틀어박혀 세월을 보내고 싶은 소망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예견되고 있다. 시 속의 나타샤는 바로 자야였던 것이다. 청진동에서 함께 살던 시절 백석과 자야는 광릉으로 단풍 구경을 간 적이 있다. 개울가를 지날 때 자야를 업은 백석이 발을 헛디뎌 옷이 다 젖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노인이 옷을 말리고 가라고 해서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아랫목은 옷을 말리기 위해 내 주고 자야와 백석은 추운 한데서 꼭 끌어안고 밤을 보낸다. 이때 자야는 “소원한 부부라도 이런 방에 가두어 두면 십년 소박 쯤 저절로 해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백석은 “그 작은 몸에 웬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았어”라며 딴 소리를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여운 연인들인가.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너무도 짧았고 비극적인 한국현대사에 묻히고 말았다. 짧아서 더욱 아련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일임은 사실이다. 각 시대마다 아픔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같은 거 더럽다고 비장하게 버리지 않더라도 사랑할 시간은 많다. 눈이라도 푹푹 나리면 어디서 흰당나귀가 좋아서 응앙응앙 울 정도로 미련없이 사랑하고 볼 일이다.
글. 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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