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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대항해보다 빨랐던 정화의 남방원정



 명나라 영락제 시기인 1405년 길이 44장(약 130m)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포함한 62척의 함선들이 소주를 떠나 남방으로 항해를 떠났다. 승무원이 2만 7천여명에 달했다니 하나의 도시가 움직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함대의 총 사령관은 정화. 고위급 환관이었던 그의 나이 34세 때 일이었다. 정화는 원래 중국 남부 윈난성 이슬람교도 집안 출신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윈난성을 공격할 때 어린 정화는 명군에게 붙잡혀 환관이 됐다고 한다. 이후 영락제에 등극한 후 환관고위직인 태감이 되었고 그의 특명에 따라 정화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했다. 정화의 함대는 한차례가 아니라 무려 7차에 걸쳐 남방원정에 나섰다. 정화는 34세부터 죽을 때까지 30여년의 인생 전체를 항해를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수차례에 이르는 이 엄청난 규모의 원정은 왜 시작을 했을까.

 원정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현재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주원장의 손자인 건문제의 왕위를 찬탈한 영락제가 남방으로 탈출한 건문제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고, 아랍 및 티무르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조공을 받기 위해서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설들이 그 엄청난 규모와 수차례의 원정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멀리 진출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일부 동남아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바치게 한 적도 있고, 반항하는 국가들을 진압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유럽의 제국주의처럼 땅과 재화를 약탈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남방과 아랍의 진귀한 물건들과 사자, 얼룩말, 코뿔소 등 희귀 동물들을 들여온 적은 있지만 약탈과 진압을 위한 원정이 아니었다. 중국은 자급자족이 되는데다 자기네 대륙 다스리기에도 바쁜 나라라 유럽처럼 다른 대륙을 넘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정화의 마지막 원정이 된 7차 원정은 영락제가 죽은 후 선덕제 대에 행해졌다. 이미 환갑을 넘긴 정화는 원정대의 사령관을 고사했다는데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어서 결국 원정대를 맡았다고 한다. 정화의 마지막 원정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아랍의 메카까지 이르렀다. 마지막 원정을 다녀온 후 정화는 숨을 거두었고 그 이후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지 않았다. 정화의 죽음과 함께 명나라의 대항해는 막을 거둔 것이다.

 정화의 마지막원정이 있었던 1431년 이후 60여년이 흐른 1492년 인도를 찾아가던 콜럼부스의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유럽 사람들에겐 미지의 땅이었던 인도와 아시아로 향하는 길이 그 뒤에 열렸다. 대항해와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며 아시아 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항 등이 사실 정화의 원정대 때부터 개척된 곳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서구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말라카 시내 한 켠 첸훙텡 사원에 정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서구의 본격적인 침탈 요새가 되면서 수백년 동안 파란만장한 격동을 겪어 온 말라카. 평화로운 관광지가 된 요즘에 와서야 정화의 넋도 편히 잠들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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