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아제(triage)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응급실의 규범같은 것인데 전시 야전병원의 트리아제에 따르면 작은 부상을 입은 병사를 먼저 치료한다. 빨리 회복시켜서 다시 전쟁터로 되돌려 보내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심각한 중상을 입은 병사는 안타깝지만 뒷전으로 몰린다. 평화시 일반 응급실에서는 반대로 된다.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급한 환자를 일단 먼저 치료한다. 권력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자기 먼저 치료해 달라고 생떼를 쓰는 것은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선박이나 비행기 등 대형 교통수단의 비상상황에서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된다. 재난이 발생하면 아이들과 여자를 먼저 구조한다는 ‘버큰헤이드호 전통’이다. 버큰헤이드호는 1852년 당대 최강을 자랑했던 영국해군의 수송선이었다. 병사들과 가족들을 태우고 항해하던 중 암초에 부딪혀 침몰위기에 처했고 승객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승객은 630명이었는데 구조선에 탈 수 있는 인원은 180여명에 불과했다.긴박한 상황에서 배의 책임자인 시드니 세턴 대령은 전 병사를 갑판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구조선에 아이와 여자들을 먼저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먼저 살겠다고 구조선에 뛰어들면 모두가 동요되어 서로 뛰어들
국민학교 때 우리집에는 삼중당문고가 꽤 많이 있었다. 부모가 독서광이어서가 아니라 인쇄소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파본이나 남은 책들을 가져다 놓은 것인데 글자도 작고 제목도 국민학생에겐 어려워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년잡지나 만화책 등 읽을만한 게 떨어지면 삼중당문고를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 중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만한 만만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으니 바로 병신과 머저리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나 생의 한가운데는 못 읽어도 이건 읽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병신과 머저리라니. 길창덕 만화같고 얼마나 쉬워보이는가. 그런데 채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뭔말인지 몰라 포기하고 말았다. 병신과 머저리 얘기가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그렇게 병신과 머저리는 어려운 무엇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그 병신과 머저리를 최근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떼우다 선 채로 읽었다. 전쟁터에서 동료를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인데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 더 찡하게 와 닿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간지라도 나는데 병신과 머저리는 슬프고 초라하고 정말 병신과 머저리처럼 짠한 울림이 온다. 와닿음도 감동적인 와닿음이 아니다. 아프다기보다는 창피해서 서둘러 봉합해버린 상처를 사
봄이 오면 군항제가 열리는 진해는 가는 길목에서부터 교통체증이 일어난다.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은 벚꽃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때문이다. 어디 진해 뿐이랴. 섬진강변 하동과 서울 여의도 그리고 비교적 덜 알려진 길들까지 포함하면 수백만 혹은 그 이상의 인구가 벚꽃을 보려고 몰려든다.잡지사 사진기자들은 벚꽃이 만개할 때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아서 내년 봄호에 넣을 사진을 준비한다. 잡지의 특성상 아직 꽃이 피기 전에 봄호를 준비해야 하는데 화창하게 핀 꽃 사진을 지면에 실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올해 벚꽃 사진이 내년 4월호에 실리는 것이다. 사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벚꽃이 그 벚꽃인데.사람들도 지난해에 본 벚꽃과 똑같은 벚꽃 보겠다고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자동차품 팔아 발품 팡아 같은 장소로 몰려들지 않는가? 그 벚꽃이 그 벚꽃인데.나이가 지긋하신 소설가 분에게 들은 말인데 봄에 벚꽃을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내가 한 해를 더 살아서 또 아름다운 꽃을 보는구나. 올해도 잘 살아서 내년에도 예쁜 꽃을 보면 참 좋겠다. 지지고 볶곤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어 고마운
‘관록’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일에 상당한 경험이 쌓여서 생긴 위엄이나 권위를 말한다, 고 국어사전에서는 정의한다. 그에 따라 '관록있는 인간'이라는 개념도 파생된다. 그런데 젊은 층들에게 관록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 사전적 의미를 고분고분 받아들이더라도 실제 업무에 임할 경우에 관록은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추상적이거나 맥이 잡히지 않는 개념은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 생각하면 이해될 경우가 많은데 내 수준에서 관록은 영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career나 experience 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고, veteran이라고 하기엔 그리 쿨하지 않다. dignity라고 하기엔 당치도 않다. 개념파악이 어려운 것은 관록이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위엄, 존경, 권위 등 번역되지 않는 추상어들 때문이다. 이런 추상적 개념들을 젊은층들은 '꼰대스럽다'고 칭하곤 한다.물론 한 가지 일을 오래 해 온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깊은 지혜와 그윽한 멋에 우리는 감동한다. 이런 사람들이 꼭 유명인이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만은 아니다. 말을 잘 해서도 아니다. 그냥 우러나온다. 한 가지 연구에 수십년 매진을 했건 식당 주방에서 잔뼈가 굵었건 그런 사람들은
1982년 영국 가수 엘튼 존은 ‘Empty Garden’이란 곡을 발표했다. 두 해 전 자신의 집 앞에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존 레논을 추모하는 노래였다. 엘튼 존은 뛰어난 뮤지션이자 행위예술가, 반전평화 운동가였던 절친 존 레논에게 어떤 화려한 찬사도 수식어도 붙이지 않았다. 그저 식물을 정성껏 돌보고 정원을 가꾼 세심한 가드너였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정원을 아름답게 돌봐온 최고의 정원사를 그 누가 대신할 수 있겠냐며 이 텅빈 정원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정원을 거닐고 싶다고 간절히 노래했다.엘튼 존의 노래에 빗대지 않아도 영국에서는 실력있는 가드너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찬사보다 값진 것이다. 수천 명의 가든 전문가들이 활약하고 있고 사회적 지위와 보수도 대단히 높다. 그런 가드너들을 선망하며 가드닝을 실천하고 있는 아마추어 가드너들은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가드닝 자체가 생활의 일부고 가드닝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가드닝 선진국 영국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우리의 정원문화 현실을 돌아보자.부끄러운 고백 하나. 난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난해 봄, 꽃과 나무가 좋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우연히 가게 된 하동
MIT공대 냉장고실험이란 게 있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냉장고에 콜라 5개와 1달러 다섯개를 넣어뒀다. 그리고 반응을 봤는데 무엇이 먼저 없어졌을까?답은 콜라다. 72시간 만에 콜라 5개가 다 없어진 반면 1달러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콜라를 가져간 학생에게 물으니 “1달러는 돈이라 죄책감이 들었지만 콜라는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이번에는 택시기사들을 상대로 실험했다. 앞을 보는 사람 10명과 그렇지 않은 시각장애인 10명이 택시를 타고 정해진 코스를 가는 것이었다. 택시기사들이 거리를 속여 돈을 더 받은 것은 어느 그룹이었을까?시각장애인? 아니다. 앞을 보는 사람을 속이고 시각장애인은 속이지 않았다고 한다. 택기기사들에게 물으니 “내가 장애인을 속일 정도로 비양심적인 인간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 기준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대로 살인을 하면 안된다는 도덕적 기준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쟁터에서 집단적으로 누군가를 린치하면 가담하는 것. 누군의 물건을 훔치는 건 나쁘지만 누군가 나에게 잘못해서 더 준 돈은 가져도 된다는 것 등. 택시기사들을 예로 들면 시각장애인을 등쳐먹지 않
본격적으로 새출발의 시기가 됐다. 대학에는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파릇파릇한 기운이 넘쳐날 것이고 사회에 나온 청춘들은 저마다 간직한 꿈을 향해 첫걸음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청년실업, 카드빚에 시달리는 선배들을 보면 마음이 마냥 상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청춘들 사이에서 ‘잉여’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고 있는 것도 우울한 현실이다.난 박정희 키드라 솔직히 잉여의 아픔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잉여란 말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옛날 잉여인간이란 영화가 있었다. 1964년 개봉된 영화로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유현목 감독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제작비 500만원 정도에 5만명의 관객을 끈 대흥행작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다루는 잉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자처하는 잉여와는 매우 다르다.극중 주인공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아도는 인간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아주 적극적인 마인드로 인생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이다. 막말로 취업도 안되고 현실은 개판이어도 세상에 희망이 없겠냐, 하는 낙관적인 드라마다. 지금의 자칭 잉여들이 보면 동의하지 못할 계몽적인 드라마인데 유현목 감독님과 친분이 있었던
“부여를 한 바퀴 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뫼 강경이까지 들이닥친다.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녓적이라 하겠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는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백산맥에서 차령산맥으로, 공주와 부여를 거쳐 군산에 이르는 물줄기처럼 1930년대 당시 군산 가는 길은 멀었다. 기차로 꼬박 8시간, 밤을 새서 달려야 아침에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차를 타건 기차를 타건 서울에서 출발하면 2시간 반 만에 군산에 도착한다.차 몰고 새만금 방조제가서 드라이브하고 회센터에서 회 먹고, 조류도감 때문에 요즘은 곤란하겠지만 금강철새조망대 가서 철새들 구경하는 등 군산에는 다양한 여행테마들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찍고 군산을 다녀왔다고 하면, 군산 입장에서는 대단히 섭섭하다. 무엇보다도 군산은 한국 근대문화를 체험할 수 있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백영서 원장이 지난해 말 내놓은 저서 제목이다. 14년 전인 2000년에 발간한 동아시아의 귀환에 이은 후속작으로 동아시아를 둘러싼 담론이 국가 간 대립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어 공생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담고 있는 책이다.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을 롤 모델로 삼고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치열하게 직진해 온 한국에게 동아시아는 무엇이며, 그들 시각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지형은 어떠한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글들이 담겨있다.저자는 동아시아를 기존의 ‘한국 중국 일본 더하기 몇몇 국가’ 식의 고정된 지리 개념을 벗어나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전제로 하는 동아시아 개념은 동북아와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 전반이 공통으로 지닌 문화유산 또는 대대로 이어져오면서 지역 내 교류나 경험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국가들을 ‘개도국’으로 싸잡는 현실에서 매우 지당한 제안으로 보인다. 나아가 동아시아나 동북아, 동남아 하는 용어도 이제는 바꿔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용어 자체에 서양의 시각이 스며있는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하고
이맘쯤 경남 남해에 가면 곳곳에서 빨래 말리 듯 생선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메기라는 물고기인데 남해에서는 겨울철 별미로 통한다. 시장에 가면 살아있는 물메기들이 다라 한 가득 채워져 있고 마치 열병식하듯 열을 지어 알몸으로 늘어서 있다.생선치고는 몸이 지나치게 통통한데다 눈이 너무 작고 지느러미도 작고 부실한 게 헤엄이나 제대로 칠 수 있으려나 싶게 생겼다. 그래서 옛날에는 생선 취급을 안 했고 잡혀도 보기 흉하다며 그냥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남해 사람들은 물메기를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물고기, 서민의 물고기라고 말한다. 물메기가 상품가치가 없던 시절 어촌서민들에게는 아주 요긴한 먹거리였기 때문이다. 탕으로 끓여서 후루룩 마시기도 하고 남으면 말려서 구워도 먹고 된장을 발라 쩌 먹기도 하고, 물메기는 참 다양하게 서민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준 것이다.지금은 물메기의 몸값이 높아져서 현지에 가도 물메기탕 한 그릇에 1만원은 줘야 한다. 서울 등 도심지에서는 더욱 귀해서 1만원이 훌쩍 넘는다. 나는 거의 모든 물고기들을 즐겨 먹지만 물메기만은 먹지 못한다. 생긴 게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왠지 경쟁력 없어서 사회에서 밀려나는 루저같은 이미지인데다가